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아편전쟁 (문단 편집) == 평가 == 영국이 대승을 거두긴 했지만, [[아편]]의 해악으로 인해 아편 수입을 막으려는 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 때문에 당대와 현재를 막론하고 많은 비난을 받는다. 심지어 당대 반대파조차 "승리할 것은 자명하지만 '''그로 인한 [[나라 망신|위신의 실추]]가 더욱 더 두렵다.'''"라고 언급했다.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총리 중 하나로 꼽히는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이때 초선의원이었는데, 의회연설에서 “원인이 이렇게도 부정한 전쟁, 이렇게도 불명예가 되는 전쟁을 나는 여태까지 알지 못한다. 광저우 앞바다에 휘날리는 유니언잭(Union Jack)은 악명 높은 아편 밀수를 보호하기 위해 펄럭이는 것이다.” 라고 대차게 깠을 정도다. 모든 전쟁이 더럽고 추악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아편전쟁은 인류 전쟁사에서 '''{{{#red 가장 더럽고 추악한 전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통 전쟁의 이름은 지명[* [[갈리아 전쟁]], [[크림 전쟁]] 등]이나 국가나 민족, 혹은 사람 이름[* [[고구려-수 전쟁]], [[베트남 전쟁]], [[한니발 전쟁]] 등], 혹은 전쟁 기간[* [[백년전쟁]], [[30년 전쟁]] 등]이 붙기 마련인데, 이 전쟁은 이름부터 매우 특이하게 '''[[아편]]'''이 들어간다. 보통 침략국은 여기저기서 많이 까이지만, 그중에서도 이 전쟁의 침략국인 영국은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 더불어 전쟁 당시에도, 이후에도 두고두고 욕 먹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이 전쟁은 아직까지도 영국이 대영제국 시절 저지른 참상 중 가장 어처구니 없는 추악한 행동에 명분없고 부도덕한 전쟁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그리고 한국에서 [[혐성국]]이라는 별명이 나온 사례들 중 대표격으로 꼽힌다. 대영제국 당시 온갖 식민지에 저지른 해악이 많긴 하지만 이 사건만큼 주변국들에게 까이는 일은 많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참상은 다른 [[식민제국]]도 비슷하게 저지른 경우가 많아서 쉬쉬하지만 '''주권국가가 마약 단속 나온 것'''에 반발하여 전쟁까지 일으킨 사례는 '''[[유니크|수천 년 세계 역사를 통틀어 봐도 아편전쟁밖에 없다.]]''' 아편전쟁을 두고 [[중국사]]의 대가인 존 킹 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는 이 사건을 통해 중국사가 근대로 나아갔다는 충격·반응 패러다임을 주창했으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여러 중국인들에게 많이 비판받는 설이 되었다. 사실상 중국이 혼자서 근대화를 이루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기에, 아편전쟁의 결과가 중국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은 분명하다는 의견도 있다. 현대 중국에서는 아편전쟁 그 자체로 벌어진 변화는 그렇게 크지 않아서 아편전쟁이 중국 근대 기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설도 여럿 제시되고 있다. 항구 5개는 극소수의 외국인만이 거주하였고 그중의 대다수는 선교사들이었던 데다가 영국 측의 자유무역도 청은 경제적 문제로 영국의 수출품의 구매가 어려운 반면, 영국 측이 가지고 오는 게 [[피아노]]나 [[포크]] 같은 사치품이었다. 오히려 자유무역 탓에 청의 수출 제한이 해제되면서 폭증하는 차 수입을 아편 무역으로 간신히 막아야 할 정도였다. 한편, 아편전쟁 후에도 청의 아편 단속책은 강화됐으나 근본을 때려잡지 못하고 소비자만 제압하는 정책이 결국 큰 실효를 거둘 리는 만무했고 [[제2차 아편전쟁]] 직전에는 아편 수입이 몇 배로 증가했다. 흔히 이러한 면모를 보고 [[도광제]]의 정책이 우유부단하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도광제는 재위 기간 내내 대(對) 아편 강경책을 포기한 적이 없었고, 심지어 아편중독자였던 자신도 아편과의 전쟁을 시작하면서 아편을 딱 끊어버린 강력한 정신력도 가지고 있었으며, 아편전쟁 직전에는 황족들도 아편을 피운다고 가차없이 [[신장 위구르 자치구|신강]]으로 유배할 정도로 초 강경론자였다. 정책 방향이 발본색원과 거리가 멀었을 뿐, 위에서 언급했듯 단속책은 지속적이고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영국 내에서는 오히려 이 전쟁을 너무 쉽게 끝냈다는 비판이 튀어나왔다. [[제국주의|전쟁을 1년만 더 지속해 청 황조를 궁지로 몰아넣었다면 더 많은 은을 챙겼으리라 애석해 했다는 것.]] 이런 불만은 남경조약과 아편 판매에도 불구하고 청과의 차 무역 수지가 나아질 기미가 없자 더 강하게 나타났다. 즉 제1차 아편전쟁의 끝은 문제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 시작이었을 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